6. 청년방위대 참여
주한미군의 잔여부대가 한국에서 철수를 완료할 단계에 이르는 등 급변하는 국내외의 정세를 감안하여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20만의 민병을 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청년에 대하여는 병역에 편입할 때까지 대통령의 정하는 바에 따라 군사훈련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1949년 8월 제정된 <병역법>에 의하여 창설근거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 겸 대한청년단장은 대한청년단을 주축으로 하여 청년방위대를 창설하였다. 해체된 호국군 병력은 각 도의 병사구사령부로 흡수하였다.
대한청년단은 비록 군사단체나 민병조직은 아니었으나, 치안 및 반공활동을 전개하면서 청년간부들을 선발하여 육군보병학교 배속장교교육대로 보내어 40여 일의 단기훈련을 마치게 한 다음, 육군 예비역소위로 임관시켰다. 그 수는 제1기와 제2기생을 합하여 이미 700명 정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한청년단 배속장교로 임명되어 전국의 청년단원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대한청년단을 모체로 하여 등장한 청년방위대는 매우 빠른 시일 안에 전국적인 조직 구성을 완료할 수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11월 5일에는 육군본부 교도국(敎導局)이 청년방위국으로 개편되어 청년방위대의 업무를 지도하게 되었다. 12월 1일에는 충청남도 온양에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를 설치하고 선발된 요원들에게 1개월의 훈련을 실시하여 방위소위로 임관시켰다.
청년방위대의 창설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편성된 대한청년단을 주축으로 하되 그 간부요원은 대한청년단 배속 장교와 해체된 호국군 장교를 우선적으로 선발하였다. 대한청년단 각 지부에서 선발한 제1,2기 간부요원 720명을 육군보병학교 배속장교교육대에 파견해 40일간의 훈련 후 예비역 소위로 임관하여 대한청년단 배속장교로 전국에 배치돼 청년들의 군사훈련을 지도했다. 차일혁은 호국군 장교 우선 선발이라는 경우에 해당되어 청년방위대의 간부요원으로 선발되었다. 대한청년단 배속 장교들과 같이 청년방위훈련학교 수정반에 가서 2주간의 교육을 받은 다음 임명되는 절차를 밟았다. 이 학교는 그 뒤 수원으로 옮겨졌다가 1950년 6월 10일 간부양성의 업무를 마치고 문을 닫았다.
방위대의 편성으로 전국 시,도 지구별로 사단급에 해당하는 방위단을 설치하고 방위단장으로 방위중령이 임명되었다. 전주 중앙동에 15청년방위단이 설치되었다. 차일혁은 방위소령을 달고 총무처장에 임명되었다. 현역으로는 대위에 해당하는 계급이었다. 1950년 4월 말에 이르러 청년방위대는 각 도에 단(團:사단급)을, 각 군에 지대(支隊:연대급)를, 각 면에 편대(編隊:대대급)를, 다시 그 예하에 구대(區隊:중대급)와 소대를 거느리는 방대한 규모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50년 3월 15일부로 육군본부 직할로 17개 단과 3개 독립단 등 20개 청년방위단의 부대편성이 완료됐다. 한편, 50년 6월 10일 청년방위국을 폐지하고 청년방위대고문단을 설치했다. 전주 15청년방위단에는 현역군인으로 이용문 대령이 훈련지도관으로 와서 호국군에서부터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이용문(李龍文)은 1916년 평양 출생으로, 193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50기로 졸업하여 기병소위가 되었다. 1943년 일본군 소좌(소령)로 남방전선에 전속되었다가, 1947년 귀국하였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7기 특기생으로 소령에 임관되었으며, 1949년 육군본부 정보국장에 임관되었다. 1951년 준장으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이 되었으며, 이때 그가 육군본부 정보국장 당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 근무하던 박정희 대령을 차장으로 발탁하였다. 그 후 생각이 비슷하였던 두 사람은 긴밀한 사이가 되었으며, 그는 박정희의 유일한 존경 대상이 되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과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발췌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킴으로써 일어난 부산정치파동 때 국방장관 신태영(申泰英)의 2개 대대 병력 차출 지시를 거부하였는데, 이는 당시 이종찬(李鍾贊) 참모총장의 뜻이기도 하였으므로 이종찬 총장은 해임되고 그는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그해 다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지휘하는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전임되었고, 이듬해 작전 지휘 중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북방에서 1953년 6월 24일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였다. 차일혁이 서남지구전투경찰대 2연대장 때 부근인 남원 주천에 주둔하고 있어 그의 사망소식을 일찍 알았다.
차일혁은 이용문과 두주불사 등 서로 잘 맞아 전주의 요리집 행원(杏園)에 들르곤 했다. 행원은 한국 남종문인화의 대가 의제 허백련의 제자이며 국전 특선작가이던 남전 허산옥이 1950년에 설립해 전주전통음식을 팔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행원은 단순히 전통음식만을 팔던 곳이 아니라 국악인과 어려운 미술인들을 후원해 주었다. 행원의 본채에서 당대의 명창이던 신영채, 임방울, 박초월, 김소희 선생 등이 왕성하게 활동했다. 당대 명창들이 남전 허산옥의 신세를 졌으며, 전주에 다니러온 외지 인사들이 반드시 거치는 풍류의 명소였다. 5~60년대는 하늘을 찌르는 명성으로 인해 불야성을 이루었다. 차일혁은 손님들과 함께 이곳에 와서 판소리 등 국악을 즐기고 장구를 잡는 등 활동을 하며 국창인 임방울과 교분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차일혁의 녹음을 보면 차일혁이 명창처럼 부른 권주가 등 잡가와 시조가 나오는데 이러한 노래는 청소년기가 아니라 다 성장해서 배우는 노래로 차일혁이 임방울과 교류하며 이런 노래를 배웠다고 짐작된다. 임방울은 차일혁과 정신적으로 소통하는 부분이 많아 차일혁이 1954년부터 1956년 충주경찰서장을 할 때 여러번 충주로 가서 공연을 하거나 차일혁의 관사에 찾아가 차일혁과 같이 판소리를 하곤 했다.
그러나 청년방위대의 현실은 힘들었다. 청년방위대는 구실만 좋을 뿐 시설과 장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복장도 통일되지 않은 대원들과 목총으로 훈련을 쌓아나갔다. 6·25전쟁이 시작되자 무장과 훈련상태가 대체로 부실하였던 청년방위대의 조직은 흩어지고 말았으나, 수많은 대원들과 간부들은 모두 국군에 입대하여 조국수호의 사명을 다하였다.